내 고향 대구 발견-발행인 장현준
필자는 대구에서 태어나 중구를 거쳐 지금은 달서구에 살고있다. 소위 대구 50년 토박이인셈이다. 그러나 대구를 얼마나 알고 있고 타인에게 얼마나 소개를 할 수 있냐고 물어 본다면 고개를 떨굴것이다.
대구 경화여고 진학진로 부장이고 양파티브이뉴스 편집위원이 정왕부선생의 제안안으로 학생들과 함께 대구를 알아보자는데 의기 투합을 했다.
주제와 동아리 이름도 지었다.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역사 속의 나'라는 주제를 가지고 '내 고향 대구 발견'이라는 자율 동아리를 만들었다. 여러차례 회의를 진행하고 첫번째 대구를 알고자 하는 것은 어느 성에나 있는 4대문이였다.
대구읍성에도 분명 4대문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주제를 제안했다.
대구읍성을 알아보고 4대문에 대한 자료를 조사했다. 4대문이니깐 4개조로 나눠 4대문이 있었던 흔적과 역사를 찾아 나섰다.
필자는 2번째 조로 대구 읍성의 서문을 찾아 나섰다. 아이들이 미리 조사를 통해서 서문은 문이 2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서문인 달서문(達西門)이고 또 하나는 서쪽의 작은문이란 뜻으로 해석되는 서소문(西小門)이다.
필자도 인터넷을 통해 대구읍성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다.
대구읍성(大邱邑城)은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에 있었던 읍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선조 23년(1590년)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처음 쌓았던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대구부에 자리잡은 경상감영을 보호하는 치소로서 여러번 중수되다가, 외교권 피탈 뒤인 광무 6년(1906년) 10월,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등에 의해 불법 철거되었다.(출처 : 네이버 위키백과 '대구읍성')
2014년 4월 4일, 대구광역시는 경상감영 · 대구부 관아 · 대구읍성 복원에 2022년까지 400억을 투입한다는 경상감영 복원 정비사업 계획을 발표하였다.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鎭東門) · 달서문(達西門) ·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 · 공북문의 4대문(大門)과, 그보다 조금 작은 동 · 서 2소문(小門)까지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 · 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다.
읍성 안으로 북동쪽에는 경상도 전체의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지였던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客舍) 달성관(達城館)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하였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조선 후기에 한양,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이 높았던 시장이었다.
달성관 앞마당에서는 매년 2월에 대구에서 약령시가 열릴 때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인들이 찾아드는 큰 장이 열렸는데, 이미 장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사람과 말이 몰려들기 시작해 읍성의 북문부터 남문에 이르는 길가마다, 성안에서 서문에 이르는 길가마다 집집마다 상점이 열리고, 작은 공터에까지 노점이 세워졌다. 수백 마리의 말과 수만 명의 상인이 최소 한 달을 대구에 머물렀고, 비단 약재상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여각이나 주막, 그 밖의 많은 상점들이 호황을 누렸던 당시의 대구에서는 "대구 상인들은 약령시 열리는 한 달 동안 벌어서 1년을 편안히 놀고 먹는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출처 : 네이버 위키백과 '대구읍성')
사진으로 대구읍성의 서문의 흔적과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