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에 혼자 만행 길에 봉선사(奉先寺)를 찾은 적이 있다. 봉선사 요사채 가운데는 피우정(避雨亭)이라는 현판을 내건 건물이 있었다. 사찰에는 보기 힘든 현판이어서 잠시 서서 뜻을 헤아리는 데, 방문을 열고 익히 아는 노스님이 나왔다. 강남 봉은사 전 주지와 총무원 부원장을 지낸 바 있는 변희준(법명=밀운)스님이었다.
1980년대 초에 밀운스님은 봉은사 주지 겸 조계종 총무원 부원장직에 있었고, 나는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직을 하고 있었다. 밀운스님의 계행이 청정한 비구정신과 해박한 지식에 나는 존경하여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연히 방문을 열고 나오는 밀운스님을 보고 나는 반가워 합장 인사를 하고 안내대로 방안에 들어가 큰절을 올렸다. 그간 적조했던 대화를 나누고 난 후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왜 피우정(避雨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은거하신 겁니까?” 그는 웃으며 “잘 아실 텐 테?” 했다. 나는 금방 눈치를 챘다. 그는 과거 서의현 총무원장 시절 총무원장과 큰 갈등을 겪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남 봉은사 주지와 총무원장과 갈등과 시비로 법원에 소송전이 붙고 각기 지지 승려와 신도들이 집단 다툼이 있었다. 경향각지에서 인구에 화제가 된 큰 사건이었다. 갈등은 종단발전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결론은 밀운스님은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의 비를 피한다는 뜻에서 본사인 봉선사에 피우정의 현판을 걸고 은거하여 은인자중(隱忍自重)한 것이다. 그 후 밀운스님은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존경을 받았다. 의현스님은 총무원장으로서 조계종 발전에 기여를 하고, 작금에는 대구 동화사에서 조실로 추앙을 받고 있다. 모두 조계종을 중흥시킨 고승들이었다.
나는 피우정(避雨亭)이라는 단어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전체는 물론, 전국 사찰이 피우정이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인생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불행이 닥쳤을 때, 바꾸어 말해 불행의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스스로 불행을 헤쳐 나갈 능력이 없을 때, 부처님이 자비로 상주설법(常住說法)하시는 불가(佛家) 즉 사찰을 찾아가 의지하는 것이다.
근거의 하나로 중국 명나라 태조 주중팔(朱重八)도 당시 원(元)나라 학정, 폭정에 조실부모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고통 받을 때, 황각사(皇覺寺)의 고승인 고빈(高彬)노스님이 황각사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는 구원을 받았다. 10대의 중팔(重八)은 낮에는 사찰의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고빈노스님에게 학문을 배웠다.
고빈노스님은 속세에 있을 적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하다가 악인의 무고(誣告)에 의해 벼슬을 떠나 승려가 되어 황각사에 은거하는 대학자였다. 고빈노스님은 중팔의 관상을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로 거두어 법명을 법해(法海)라고 하여 사미계를 주고, 깊은 뜻이 있어서 법해에게 불교 보다는 무경(武經)으로 불리는 강태공의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손오병법을 남모르게 가르쳤다.
이를 상상해보시라. 낮에는 황각사에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이 깊은 노승에게 무경(武經)을 배우는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고해의 인생에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황각사에 법해의 사형들은 오직 황각사 주지자리를 탐내고, 서로를 백안시하고 갈등하고 있고, 시줏돈과 젯밥 싸움을 할 때, 고빈노스님은 법해에게 천하를 얻는 학문을 전수해주고 있었다.
법해스님의 사형들은 법해가 고빈노스님의 총애로 황각사 주지직이 법해사제에게 가는 것 같아 법해에 대해 백안시는 물론 이를 갈아 미워하며 해치고자 하였다. 불운에 의해 황각사가 원의 군대의 의해 전소되고, 고빈노스님은 열반하기 직전 법해에게 황각사를 떠나 세상을 구원하라는 유언을 했다. 법해는 원에 대항하여 싸우는 의병 홍건부대 곽자흥부대에 24세의 나이로 졸병으로 자진 입대했다.
그는 고빈노스님의 유훈대로 민심수람(民心收攬)에 총력을 다해 마침내 장군이 되고, 44세 때에 중국 황제가 되어 명태조(明太祖)가 되었다. 그는 황제가 되어 무엇보다 먼저 전소된 황각사를 중창해주었다. 요약하여 명태조는 사찰에 들어가 시줏돈이나 탐내고 젯밥이나 탐내는 승려가 아닌 중국 천하를 얻는 공부를 깨달은 것이다.
한국의 사찰에도 피우정(避雨亭) 노릇을 했다. 인생의 초년에 불행의 비를 만난 소년 소녀들은 부지기수로 사찰에 찾아왔다. 한국 불가는 불종자(佛種子)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모두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학문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근거의 하나는 김구(金九)도 마곡사의 원종(圓宗)스님이었고,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도 소년시절 불행의 비를 피하기 위해 불문의 제자가 되었었다. 이 글을 적는 필자도 6,25 직후 불행의 비가 쏟아질 때, 피우정 같은 고창 선운사에 의지했다. 당시 선운사 주지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불교 대학자인 운기(雲起)노스님이 있었다. 그는 황각사의 고빈노스님같이 젯밥이나 부처팔아 시줏돈이나 받아내는 사상보다는 불경과 함께 한국 전체와 동북아를 통찰하는 학문전수가 있었다.
전국의 사찰에서는 불행의 비를 피하려 찾아온 인재들에게 한국불교 중흥을 해주는 인재를 바라면서 애써 진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작게는 각종 승가대학과, 동국대 불교과에 진학하게 해주고, 크게는 일본 불교대학에까지 유학을 하게 해주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불교를 중흥 해달라는 간절한 바램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공부를 하러 간 대부분의 승려들은 정든 산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첫째, 사회로 진출하여 인연 있는 여자와 짝을 이루어 사는 것이요, 둘째, 대처승(帶妻僧)이 되어 비구 종단인 조계종을 떠나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동국대 불교과도 자진 폐업하듯 문을 닫았다. 불교과에서 공부한 승려들이 95% 환속하는데, 애써 종비(宗費)를 들여 교육해서 무엇하느냐는 것이다. 께닫고 보면 인생이 한바탕 꿈인데, 남녀가 짝을 이루어 이층(二層)을 이루어 마치 용맹정진하듯 섹스의 쾌락을 찾고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혈안이다가 인연이 다하면 남녀 각기 혼자서 저승으로 갈 뿐인데, 쾌락을 불변의 진리로 믿고 사는 인간들이 많은 것이다.
한국경제가 좋아지니 예전같이 초년의 불행의 비를 피하려고 불가에 의탁하는 소년소녀의 행자(行者)와 사미승도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독신승 노릇을 싫어했다. 누군가 불교를 만대(萬代)에 전하려면 혼자 비 맞고 있는 외로운 숫닭처럼 독신승인 비구불교 보다는 대처승이 옳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글을 보아주는 독자 제현은 어떻게 논평하시는가? 밤이면 아내를 안고 자고, 아내를 위해 악착같이 돈에 혈안이 되는 승려가 좋은가? 팔만대장경을 통독해도 승려가 밤에는 여자와 이층을 이루며 살라는 불경은 찾을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결론과 제언
피우정(避雨亭)같은 한국불교에서 불교중흥을 위해 인재양성을 위해 왕자(王子)같은 인재와 서울대 같은 수재를 승려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유명대학을 나와서 짝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조계종의 힘든 독신 승려가 되려고 하겠는가? 부처님같이 한나라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출가 수행자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전생의 업으로 초년에 불행의 운수인, 불행의 비를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소년소녀, 청년, 처녀들에 구원의 손을 내밀어 학문을 가르쳐 장차 불교중흥에 활용하는 방법이 유일한 것 같다.
그러나 작금에는 불행의 비를 피하기 위해 산문을 두드리는 인연있는 남녀가 희소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바라건대 인연있는 젊은 남녀가 산사에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조계종이 베푸는 제도가 더욱 좋아지는 피우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금의 한국불교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 종교를 말살하려는 정치인과, 대도같은 정치인들에 맞서 투쟁하고, 서민들의 복지를 주장하는 한국불교로 중흥되었으면 나는 조석예불 때 간절히 기도한다.
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