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깔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다. 적을 경시하면 나의 보배를 잃게 된다. 따라서 무기를 들고 맞싸울 때는 비분에 차있는 병사들이 이기게 마련이다.”
이 군사적 용어는 주(周)나라 시대의 인물로 알려진 이이(李耳.-노자를 말한다)의 ‘도덕경‧제69장’에 기원을 두고 있다.
노자는 군사가가 아니었지만 정신(심리)적 요소가 전쟁의 승부에 큰 작용을 한다고 인식했다. 두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모두가 감정이 격해있고 적개심에 불타겠지만, 비분강개의 심정이 충만한 쪽이 승리를 거둘 것이다.
손자병법 작전편(作戰篇)에서는 “적을 죽이는 것은 분노”라고 말한다. 백전기법 노전(怒戰)에서는 “무릇 적과 싸울 때는 병사를 격려해서 분노하게 만든 다음 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애병(哀兵)’을 수준 높은 군사 예술, 병가의 권모술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애병’의 운용방식은 위에 말한 것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충분히 공격할 수 있으나 일부러 공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꾸민다. 충분히 지킬 수 있으나 일부러 지키지 못하는 것처럼 꾸민다. 충분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으나 전투력이 없는 것처럼 꾸민다. 이렇게 적을 혼란과 교만에 빠뜨려 수동적인 위치에 처하게 한다.
싸움에서는 어느 쪽이나 승리하길 바라며 자신의 우세를 발휘하려한다. 그래서 ‘애병’은 적의 심리를 자극하여 이쪽을 가벼이 여기게 할 수 있다. 또한 병사들은 자신들이 압박을 받고 능욕을 당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강렬한 승부욕으로 적극적인 준비를 갖추게 되고, 그리하여 기회를 봐서 작전을 펼치면 승리할 수 있다.
기원전 279년, 제나라 전단(田單)이 이끄는 군대는 연나라 군사에게 즉묵에서 포위당했다. 이미 70여 개의 성을 잃은 상태에서 즉묵은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단은 ‘애병’의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선전했다.
“나는 연나라 군사가 포로로 잡힌 제나라 병사들의 코를 베고 그들을 앞장 세워 우리와 싸우게 할까봐 두렵다.”
연나라 군대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연나라 군대가 항복한 제나라 사람의 코를 죄다 베는 것을 보고화가 나 굳게 성을 지키면서 적에게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 전단은 간첩을 풀어 소문을 퍼뜨렸다.
“나는 연나라 군대가 우리 성 밖에 있는 무덤들을 파헤쳐 조상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그 생각만 하면 무서워서 간담이 서늘해진다.”
연나라 군대는 무덤을 죄다 파내 죽은 사람을 불태웠다. 성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즉묵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함께 나아가 싸우기를 원하니, 그 분노가 절로 10배 이상 커졌다.
전단은 이제 병사들이 쓸 만하다고 판단, 몸소 판자와 삽을 잡고 병사들과 함께 노동을 분담하고, 처첩까지도 군의 대열에 편입시켰다. 음식은 모두 나누어 병사들을 먹였다. 무장을 갖춘 군대는 안에 숨겨놓고, 노약자와 여자들만 성 위에 오르게 하고는 사신을 보내 연에게 항복을 약속하니 연나라 군사들은 만세를 불렀다. 전단은 또 백성들로부터 금을 거두어 큰 덩어리로 만들고는 즉묵의 부호들을 시켜 연나라 장수에게 갖다 주며 말하게 했다.
“만약 즉묵이 항복하거든 내 가족과 처첩은 포로로 잡지 말고 편안하게 해주시오.”
연나라 장수는 기꺼이 허락했고, 이로써 연나라 군은 더욱 해이해졌다.
전단은 소 1천여 마리를 거두어들인 다음,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오색으로 용의 무늬를 그려 넣었다. 칼과 창을 뿔에 묶어 매고, 꼬리에는 기름을 부은 갈대를 다발로 묶어놓았다. 성벽 수천 군데에 구멍을 뚫어놓고는 밤이 되자 쇠꼬리에 불을 붙여 그 구멍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장사 5천명이 그 뒤를 따랐다.
소는 꼬리가 뜨거워지자 미친 듯 연나라 군영을 향해 달려갔다. 연나라 군대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듯 깜짝 놀랐다. 쇠꼬리의 횃불이 눈부시게 타오르며 광채를 내는데, 연나라 군사들이 보니 영락없는 용이었다.
연나라 군사들은 그것에 받혀 죽거나 부상당했다. 5천 명의 제나라 군사들은 물에 젖은 나뭇가지를 들고 말없이 뛰어 들었고, 성 안에서는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질러댔으며, 노인과 아이들도 구리 그릇을 두드리며 성원을 했다.
그 소리는 천지를 뒤엎는 것만 같았다. 연나라 군대는 허둥지둥 정신없이 계속 달아났고, 연나라 장군 기겁(騎劫)도 사망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도망치는 적을 뒤쫓았는데, 지나가는 성과 고을이 모두 연나라를 배반하고 전단에게로 돌아오니 군사는 갈수록 불어났다.
연나라 군사는 쉬지 않고 도망한 끝에 겨우 하상(河上-제나라의 북쪽경계)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70여 성은 모두 수복되었고, 양왕(襄王)을 거(筥)에서 임치(臨菑)로 맞아들여 정사를 보게 했다. 양왕은 전단을 평안군(平安君)에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