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연한 체육계 성폭력 침묵의 카르텔 완전히 겉어내 없애야...
체육계 성폭력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지금껏 검찰 등 권력기관, 문화예술계, 교육기관 등에서 드러난 것만도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 만연해 있음을 방증한다. 상관의 성추행 사실을 드러낸 서지현 검사의 용기가 ‘미투(Me Too)’ 운동에 불을 지핀 지 1년이 지났지만 갈 길은 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9일 체육계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전날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체육계 성폭행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는데도 제대로 사건 예방과 선수 보호를 하지 못한 정부와 체육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간판 심석희(한국체대)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가운데 빙상계에 만연한 '비정상적인 사제 관계'와 '솜방망이 처벌'이 화를 불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동계올림픽 메달밭으로 꼽히는 빙상계는 파벌의 정점에 위치한 코치들이 절대 권력을 가진 데다 성적 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체벌이 암묵적으로 허용됐다. 코치진의 폭력행위와 선수들의 절규는 끊임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변화는 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코치진은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빙상계로 복귀했다.
따라서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의 추가 고소 내용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다. 심석희는 만 17세(고2)로 미성년자이던 2014년부터, 태릉ㆍ진천선수촌 라커룸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에서 4년간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 싶으면 내 말을 들으라”는 조 전 코치의 협박 때문에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성폭행 사건을 폭로하기까지는 무려 5년이 걸린 셈이다.
심석희는 지난달 17일 조 전 코치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상태라고 한다. 1년 전 서지현 검사가 상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히며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불을 지폈다. 심석희의 고백은 아직도 곳곳에서 침묵 속에 성범죄가 묻히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조 전 코치는 성폭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어 법정 다툼이 예상된다. 심석희 측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조 전 코치는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냐"는 식으로 협박했다고 한다. 고소 내용이 사실이라면 국가대표팀의 지도자가, 온 국민의 시선을 받는 어린 국가 대표에게 저지른 이런 행위가 권력형 성범죄가 아니면 무엇인가.
지난해 1월 폭행을 견디다 못해 선수촌을 이탈했다가 복귀한 심석희는 당시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빙판을 누비던 심석희를 응원했던 것처럼, 법정에서도 심석희가 승리하기를 응원한다.
조 전 코치에 대한 2심 판결은 14일이다. 조 전 코치는 상습폭행 혐의에 대해서만 지난해 9월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피해자의 필사적인 항거나 '피해자다움' 부족 등을 내세워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된다.
이제 스물두살, 아직은 어린 심석희가 오랜 시간 혼자서 아픔을 감당하다 어렵게 용기를 냈다. 반드시 응답받기를 기대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9일 긴급히 내놓은 체육계 성폭행 대책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체육계에선 성적만 잘 낸다면 어지간한 폭행이나 성범죄에는 눈감는 관행이 아직도 있다.
제2차 제3차 피해를 우려하는 피해자의 침묵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법 보완도 서둘러야 한다. 빙상계 심석희의 '미투'를 응원한다. 문체부는 대책에서 성폭력 가해자 처벌을 강화, 영구제명 조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위를 종전보다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 강간, 유사강간 및 이에 준하는 성폭력으로 제한돼 있는 영구제명 요건에 ‘중대한 성추행’도 포함키로 한 것이다. 성폭력 관련 징계자의 국내외 체육 관련 단체 취업도 막고, 민간 주도의 비위 근절을 위해 체육단체 전수조사도 실시한다.
그러나 주종관계에 가까운 사제관계, 동업자의 비리는 대충 덮고 넘어가려는 체육단체의 ‘암묵의 카르텔’ 관행이 만연한 상황에서 이 정도의 뒷북 대책으로 체육계의 성폭력을 뿌리 뽑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더욱이 성적 지상주의를 빙자한 체벌에 이은 성폭력은 몇몇 지도자 개인의 일탈 차원을 넘어 폐쇄적인 체육계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어린 국가대표 선수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체육계는 과연 무얼 하고 있었는지 통탄스럽다. 주변 인사들이 전혀 몰랐는지, 아니면 동료 선후배의 가해와 피해에 모두 ‘침묵의 동조자’가 됐던 것인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오랜 고통 끝에 용기를 낸 심석희의 외침이 권력형 성폭력 척결로 이어지도록 정부와 사회 전체가 호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