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열대야가 지구를 왜? 온난화 시켰는지 그 원인을 이제 밝혀야 할 때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상징이었던 사자 ‘세실’과 그들 무리의 삶을 기록한 책 ‘세실의 전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냥꾼이 우두머리 수사자를 살해한 여파로 암사자는 새끼들을 데리고 나와 사람과 가축이 사는 마을을 위험하게 전전하다가 결국 다른 영역의 수사자에게 새끼들을 잃는다. 사람들은 사자 때문에 불안에 떨고 가축과 사자 모두 공포의 제물이 된다.
사냥꾼이 미국 텍사스의 집에 돌아가 행복감에 젖어 위스키에 얼음을 떨어뜨리고 있을 때, 아프리카의 새끼 사자들에게는 죽음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의 미국인이 취미로 수사자 한 마리를 죽인 일은 수많은 관계를 깨트리고 생명을 앗아간다. 수사자를 죽인 미국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고서도 그럴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큰 수사자를 잡았다는 환희에 젖어 있을 것이다.
폭염이 온 지구를 강타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폭염과 열대야로 사람들이 죽고, 가축과 양식장 물고기가 집단 폐사했다. 라오스에서는 댐이 무너져 수백 명이 실종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모든 것을 잃어 망연자실했다. 폭염과 라오스 땜의 붕괴 이 두사건 모두 인간들이 초래한 재앙임이 틀림없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이 두 가지 사건이 처리하지도 못할 쓰레기들을 만들어낸 인류의 지난 역사가 빚은 수많은 재앙 중 몇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많은 편리와 풍요를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로 인한 고통은 혜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부터 겪어야 할까. 너무나 불공평하다. 못사는 나라 라오스, 에어컨도 없는 쪽방촌 노인들.......,
그런데 바로 짐바브웨 이야기 속에 오늘날 우리가 겪는 수많은 불평등한 고통의 기원이 있다. 이 현실은 우리의 삶 곳곳에 적용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맛이 있으니 고기를 먹고, 값이 싸니 팜유(기름)제품을 쓰고, 버리기 편하니 플라스틱을 사용한다. 그 여파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부작용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역시나 그 편리의 수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들이다.
말을 할 수 없는 동물들, 식물들이다. 그리고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진실을 향한 용기를 가지고, 과감히 알고자 해야 한다. 이런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책임함, 그것이 고통의 기원 아닐까. 이 불편한 진실을 알고 나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알고서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알면서도 때론 그런 선택을 하기도 한다.
플라스틱 빨대가 바다거북의 코에 박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커피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빨대를 쓰고, 비닐봉지 80장을 먹고 숨 막혀 죽은 고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는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렇다. 인정해야 한다. 경제적 이익에 눈멀었던 우리가 라오스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렸고, 편리하고 풍요롭게 살고자 했던 욕심이 기록적인 폭염을 만들어 냈다.
플라스틱으로 가득한 바다를 만들어 수많은 바다 생물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생물 종을 멸종시켰다. 지구의 환경이 이렇게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편리함 때문인가. 이것이 인간이라면 이제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인간이라는 가능성. 인간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폭염과 열대야는 왜 일어났는가를 심도 있게 생각해 보자. 자연을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한 4대강이 우리에게 무엇을 갖다 주었나. 생각해 보자. 불볕더위를 막아줄 장치는 없다. 사람의 체온보다 높은 도시 아스팔트의 열기 때문에 폭염 경보나 내릴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인지 폭염이 지구를 온난화 시켰는지 그 원인을 밝혀야 할 때다.